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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회 맑스코뮤날레 슬로건의 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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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선다는 것 

- ‘맑스코뮤니스트’가 된다는 것

 

 

지금 한국사회는 ‘전환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조화된 냉전체제의 해소에도 불구하고 완고히 작동하고 있던 반공분단체제가 균열을 보이고 있는 것, 즉 한반도의 평화를 둘러싸고 남-북한, 북-미 사이에 일련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그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움직임들이 동북아시아, 지구적 수준에서 헤게모니를 구축하고자 하는 미국, 중국의 서로 충돌/수렴하는 거대전략과 맞물려 있기에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지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과거 클린턴 행정부시절의 ‘페리 프로세스’의 운명, 지난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이후의 교착국면, 그런 상황이 만들어내는 온갖 예측들, 상상들을 통해 볼 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지는 않다. 그것은 그 합의과정이 지난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런 단순한 사실을 전제로 할 때만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협상의 주역들이 전혀 새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과연 그들이 이 땅의 안팎에서 착취, 수탈, 차별, 배제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삶을 포괄하는 그 어떤 평화의 밑그림을 디자인하고 실행하려 하는지 관심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관심이 단지 그들의 입과 발걸음을 뒤쫓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평화의 내포와 외연에 대해 함께 고민, 논의, 공유하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가야 함은 물론이다. 역사상 그 어떤 권력도 더 많은 평화를 대중에게 자발적으로 준 적이 없고 특히 이 지구화시대에 평화의 구체화는 자기통치적인 자유-평등의 관계들이 기존 국경들을 가로지르며 더 확대, 심화되는 것에 조응하기에 그렇다. 이런 측면에서 ‘전환기’에 처한 이 사회의 평화를 담보할 내용들이 이미 도래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미 투(me too)-위드 유(with you) 운동’을 지적할 수 있다. 과거-현재의 성폭력과 트라우마에 고통 받던 여성들의 고발, 그것에 대한 각계의 집단적 지지, 연대 선언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그 운동의 성격과 위상을 하나로 집약해 그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은 최소한 성폭력과 차별에 노출되어 있던 여성들 스스로가 더 이상 그런 구조, 관계들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목적의식적인 선언, 그에 대한 연대라는 점에서 이 사회가 그 어떤 변화의 지점에 들어섰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 움직임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 여성차별, 배제의 관행을 재확인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그 역사적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운동 자체는 ‘정의의 타자로 존재하는 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 법의 존재와 의미를 규정하는 힘, 즉 고통 받는 여성들 자신의 삶에 대한 목적의식적인 성찰과 외침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그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기존의 법을 넘나들며 그것의 비루함을 드러내 교정할 수는 없다.

 

다른 하나는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제출된 ‘신고리 5, 6호기 건설중단 공약’을 둘러싼 논란이후 환경생태 문제가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문제라는 점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후쿠시마원전사건 이후 삶 자체를 파괴하는 핵의 치명성에 대한 자각이 더 깊어지고, 지난 해 여름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이상기온으로 절감하게 된 기후변화의 문제, 이제는 만성화된 미세 먼지 등이 일상의 삶 자체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그 문제들이 먹고사는 것에 종속되는 문제, 혹은 특정 국가,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난공불락처럼 보이던 성장주의에 대한 이의제기가 대중적 수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 위에서이다.

 

하지만 진정 그런 흐름들이 평화를 담보할 새로운 관계들의 출현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아니 굳이 어느 한쪽에 무게 중심을 둔다면 낙관적이라기보다 비관적이다. 그것은 그 과정이 기존의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사회, 권력 관계들의 재구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론, 실천에서의 쟁투, 즉 정치를 매개로 주조될 수밖에 없는데, 여전히 진보좌파정치는 보수-수구정치세력의 대중적 영향력아래 눌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지점에서 그런 유보적, 혹은 비관적 인식은 잠재된 대중적 주체역량을 과소평가하는 것이고 세계경제의 만성적인 침체 등 대중의 급진화를 추동할 객관적인 조건에 주목한다면 오히려 현재의 국면이 낙관적일 수 있다는 반론을 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선뜻 그 같은 의견에 동조하지 못하는 것은 그처럼 주/객의 조건을 나누어 설명, 분석하고 있는 논평들이야말로 정치의 빈곤, 부재를 반증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 변화, 변혁에 우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그 ‘객관적 조건들’에는 계급투쟁, 혹은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수한 투쟁의 결과들이 이미 기입되어 있기에 그렇다. 대중의 삶이 어려워질수록 ‘극우 포퓰리즘’이 그들의 시선을 빼앗는 현상은 그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니다.

 

그렇기에 한편으로 그런 평가를 접하면서 오랜 동안 동서의 좌파정치를 괴롭혀 온 발상, 즉 경제위기, 공황의 국면이 심화되면 될수록 사회변혁의 시간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경제환원주의’의 폐해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것은 정치를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사회관계들의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따라서 기껏해야 정치를 제도 안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대의과정으로만 보는 발상의 헤게모니를 새삼 확인시켜 줄 뿐이다. 사실 그 인지,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파국론, 종말론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발상은 ‘종교의 언술’이지 ‘정치의 언술’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인식이 그 파국에 조응하는 ‘혁명적 정세’의 도래를 말하며 과도한 주의주의로 표출되곤 하는 것은 전혀 역설적이지 않다. 거기에서 ‘경제환원주의’와 ‘주의주의’는 동전의 양면을 이룰 뿐이다.

 

그런데 이 전환기 한국사회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비관을 더 자극하는 현실적 이유는 그런 정치 빈곤과 부재의 양상이 물적, 인적으로 가장 규모 있는 운동이자 이른바 ‘맑스주의’의 가장 가까운 지점에 있다고 간주되기도 하는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에서 더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노동운동은 한국사회가 지니는 ‘보수-수구 독점의 정치-정당 구조’로 인해, 단순한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서는 진보적인 정치적 위상과 역할을 부여받아 왔다.

 

하지만 지금 그 운동에서 그러한 위상과 역할에 걸 맞는 행보를 찾기란 쉽지 않다. 민주노총이 자신의 강령, 규약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 의미 없어진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노동운동의 중심주체가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변화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과 현재 그들이 조합원으로서 몸담고 있는 공식조직인 민주노총, 산별노조들 사이의 긴장, 갈등이 해소되기보다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현실은 그들 기존 조직에 부여된, 역사특수적인 정치적 역할이 거의 소진되었음을 확인해주는 증거일 뿐이다.

 

사회변혁을 위한 현재의 정치지형에 대해 비관적이라는 의견을 제출하는 것이 여성 등 소수자에 대한 억압구조, 자연에 대한 무한한 수탈, 그리고 노동자들의 모든 생기를 쥐어 짜내려는 자본의 착취 등에 맞선 대중투쟁들의 의미를 축소, 간과하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또한 그것이 제주 강정, 세월호, 밀양 등의 투쟁, 그리고 ‘미투-위드 유 운동’ 등 지금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그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는 ‘새로운 주체들’의 자기통치적인 주체로의 성장가능성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맑스코뮤니스트 정치는 기존의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질서에 맞서는 모든 대중투쟁들이 설사 수많은 한계와 오류를 지니고 있어 온갖 비난과 모욕을 받고 있더라도 그들과 함께 걸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애초 그들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맑스코뮤니스트 정치는 그런 근본적 이유에 더하여 대중운동들 자체가 이질적 요소들의 구성물이라는 점을 파고들어 그들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이런저런 봉기를 매개로 표현되는 그 운동들의 상이한 요구와 열망을 기존의 지배적인 틀에 가두어두려는 조합주의적인 시도들에 맞서 투쟁해야 하는 운명 또한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조합주의 흐름들과의 대결을 차후의 과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넘어야 할 긴급 과제로 설정할 수 있는 의지와 힘은 오직 맑스코뮤니스트 정치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이번 제9회 맑스코뮤날레가 공식슬로건으로 내건, ‘전환기의 한국사회, 성장과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는 다소 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왜 그리 지체될 수밖에 없었는지 질문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한마디로 말하면 페미니즘, 녹색, 노동 운동 안에서 조합주의, ‘정체성의 정치’로 대변되는 흐름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보수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헤게모니가 계속 재생산되고 있음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조합주의, ‘정체성의 정치’를 비판적으로 문제시하는 것은 그 운동들이 기존의 지배질서들에 대항하여 벌이는 쟁투의 의미를 폄훼하거나 무시하려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그 운동들이 착취와 수탈,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또 따른 경계, 준거들을 만들고 옹호하기 때문이다.

 

맑스코뮤니스트 정치가 수구-파시스트들,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와 다른 것은 기존의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질서들에 맞서 싸울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미래의 질서, 따라서 ‘현재-미래의 자유-평등한 질서’의 구축을 고민, 실천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새로운 질서의 구성 과정에서 자기 자신 또한 변화, 변혁의 대상으로 상정한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의 적자’를 자임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집권이후 아무리 ‘반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 ‘사람 사는 세상’ 등의 실현을 역설해도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데, 그들은 현재의 자신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맑스코뮤날레는 지난 몇 차례의 대회를 통해 ‘녹보적(혹은 보녹적, 적녹보)연대’를 화두로 제출해 온 바 있다. 그럼에도 지금 그 시도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 각각은 분석, 지시를 위해 개념적으로 조작, 분리될 수는 있어도 현실의 관계 속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 그렇기에 그 운동들 각자가 주요한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관계들, 모순들의 해결이 또 다른 관계들, 모순들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원론적 시도는 이론, 실천의 수준에서 그 어떤 의미 있는 결과도 낳을 수 없다는 점을 공유하지 못하기에 그럴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인식하더라도 자기화하여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맑스코뮤날레가 그 이름도 무색하게 조합주의, ‘정체성의 정치’의 영향력으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해 주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이론과 실천, 이론과 실재 사이에는 항상 메울 수 없는 간격, 여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여전히 그곳을 매우거나 채우기 위한 이론적 작업은 유의미하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현실의 모순들, 긴장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맑스코뮤니스트 정치를, ‘녹보적 연대’를 종교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맑스코뮤니스트는 ‘피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나아가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 등의 모토를 신주단지 모시듯 싸안고 거기에 무릎 꿇고 절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미래의 관계들과 삶에 그 모토들을 비추어 재구성하고 그것을 아로새겨 넣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조차 지우며 끊임없이 걸어가는 이들을 이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그 길은 언제나 낯설다.

 

그런데 그 낯선 길을 걷는 것은 항상 대중, 대중운동과 함께 해야만 가능하다. 이미 지적했듯이 그들이 없는 맑스코뮤니즘은 아무리 잘해야 ‘비판의 무기’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녹보적 연대’가 교착상태에 이르게 된 또 다른 하나의 원인이 거처한다. 이번 9회 대회에 이르기까지의 지난 궤적을 뒤돌아볼 때, 맑스코뮤날레는 다양한 대중운동들과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그 간격을 확대시켜 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서구 맑스주의의 실패가 대중, 대중운동으로부터 멀어지며 강단화된 결과라는 평범한 지적을 새삼 음미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제9회 대회의 슬로건, ‘전환기의 한국사회, 성장과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는 맑스코뮤니스트가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다시 한 번 묻고 ‘녹보적 연대’의 교착상태에 숨구멍을 내기 위한 모색의 자리임을 공표하는 것과 함께 향후 맑스코뮤날레가 그런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의 더 많은 자발적 참여의 장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소망의 표현이다.

 

자본의 지배를 철폐하고 가부장체제를 넘어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실현해나가고자 하는 아름다운 이들, 모든 착취, 수탈, 차별, 배제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이들의 연대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실현 정도에 따라 전환기에 처한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 지구화시대에 걸 맞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 또한 더 구체적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제9회 맑스코뮤날레조직위원회를 대신하여 집행위원장 이광일